痕迹(흔적)-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태만/미술평론가

 

  여주의 고달사(高達寺) 유적 발굴지와 가까운 곳에 작업실이 있는 이영섭은 이 발굴현장에서 천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땅속에 묻혀있던 유물이 출토되는 현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연속성에 대해 사색하고, 이미 죽어버린 것(memento-mori)이 어느날 새로운 생명체로 육화되는 경이로운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시간이란 무자비하고 가혹한 형벌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소멸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차별한 징벌(懲罰)의 시간을 견뎌내며 어두운 미망(迷妄)에서 부활을 기다려왔던 유물들에게 시간은 새로운 생의 약속과 같은 것이다. 경주박물관에 진열된 신라시대의 토우(土偶)를 통해 필자는 천년에 이르는 시간의 연속성을 거역한 증거를 본다. 그것은 이 긴 시대를 거두절미한 채 우리 눈 앞에 불쑥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모습이라 평가받는 그 고졸하고 수더분하며 어쩌면 어눌해 보이는 해학적 표정과 단순한 형태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만 그것은 박제된 것, 박물관이란 안정되고 가역적(可逆的)인 진공공간 속에 안치된 과거의 흔적에 불과한 것이지 않은가. 우리는 이 유물 앞에서 과거를 상상할 수는 있어도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유물을 통해 과거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현재란 시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서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 진정 소멸이 아니라 단지 망각된 것이며, 언젠가 출토되기를 기다리며 지금도 땅속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은 이영섭의 작업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의 단순고졸한 형태는 말 그대로 출토의 이미지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전통적인 소조기법에 충실한 테라코타 인체조각에 전념하였던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다. 흙을 붙여가며 형태를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묻혀있던 파편들을 조립하여 그 원형을 찾아내는 의사(擬似)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자기발생적 형태를 찾아나가는 그의 과정은 역시간적 특징을 드러낸다. 즉 작업실에서 그린 밑그림을 마사토질의 작업실 마당에 다시 옮겨그린 후 그 곳을 파들어가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속에서 테라코타나 옹기파편을 채워넣고 시멘트와 모래, 석고 등으로 형태를 떠내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찾아진 형태는 표면의 질감이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덩어리가 되는데 그 형상이 토우나 미라를 연상케 만든다. 질박하지만 견고하고, 원시적이면서도 풍요로운 형태는 영원불멸하는 부동성(不動性)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지가 아니라 운동을 예비하는 형태이며, 죽어버린 시간성에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 언젠가 되찾아야 할 시간성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아주 옛날부터 조각가란 무생명의 물질인 재료에 생명을 부여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질을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은 주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에게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영섭이 안정적인 작업방식을 포기하고 거꾸로 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이 경이로움에의 동경, 출토현장에서 경험한 시간의 연속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 부여하고자한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그가 표현하고자 한 시간성은 소멸의 덧없음으로서가 아니라 발견의 새로움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