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섭이 묻고 꺼낸 것

--비인칭의 리얼리즘을 위하여

 

 (조각가 이영섭)그는 고고학자를 자처한다. 자신의 작업을 ‘발굴’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달리 그는 꺼내기 전에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꺼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묻은 것과 다른 것이고, 따라서 그가 묻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돌가루처럼 시간이 묻어 있다. 그렇게 그는 지나간 시간을 끄집어낸다. 아니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지나간 시간을 만들어낸다. 과거란 이렇게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자신의 것에 속하지 않은 곳으로 그 시간을 불러냄으로써 지나간 시간은 그에게 새로이 다가오는 시간, ‘도래(到來)’의 시간이 된다. 복잡한 형상을 좋아했던 살바도르 달리가 시계를 구부러뜨림으로써 시간으로 하여금 직선의 형식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에서 여전히 유클리드적 시간의 형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단순하고 소박한 형상을 좋아하는 이영섭은 시간 속에 현재를 끼워 넣음으로써 과거를 만들어내고 그 과거를 능청스레 현재 뒤에 오는 과거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선후와 안팎이 사라진 기이한 시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그는 그 시간에 싸인 삶을 발굴해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크게 신뢰한다. 그저 멋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조상(彫像)일 뿐이었다면, 혹은 그저 통념을 깨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 개념일 뿐이었다면, 그는 단지 탁월한 조각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발함이나 재능은 좋아하고 감탄할 순 있지만 그 자체로 신뢰를 주진 못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을, 그의 삶을 신뢰할 수 있을 때고, 그가 삶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을 때고, 그게 어떤 것이든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려 할 때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일종의 ‘리얼리즘’을 발견한다. 현실에 대한 탁월한 묘사나 부당한 현실에서 느끼는 거대한 분노, 혹은 현실을 돌파하려는 전투적 의지나 도래할 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통상적인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백두산도 파업의 깃발도 없는, 주먹도 없고 쟁기도 없는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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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별)  60x43x18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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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54x23x15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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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28x23cm 2019

 사실 그는 고전적인 의미의 리얼리즘을 통과했다. 가령 <오월>과 같은 작품은 그 묘사와 스타일에서나, 굳게 다문 입술에서나, 할 수 없이 고개는 약간 숙였지만 이마 밑에서 지그시 내리깐 눈의 팽팽한 긴장감에서나 고전적인 리얼리즘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가 택한 추상과 변형의 선들은 그의 리얼리즘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해학적이고 따뜻한 편안함을 주는 리얼리즘이다. 불의를 겨냥한 거대한 부정의 힘으로 가득찬 형상이 아니라 투박하고 평범한 긍정적 삶의 형상, 주먹을 쥔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 보듬고 껴안은 민중의 형상, 억압에 항거하는 특별한, 그런 의미에서 어떤 ‘탁월한’ 인물이 아니라 어디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하지만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그대로 껴안고 있는 인물들, 이것이 그의 리얼리즘을 만든다. 그가 불상의 형태를 만들 때도 석굴암보다는 운주사의 그것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것은 ‘비인칭의 리얼리즘’이다. 어떤 특별한 서사도, 어떤 훌륭한 주체도, 어떤 유별난 사건도 없이 소박하고 투박하게 삶을 살 뿐인, 그렇기에 누구든 아무 부담 없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게 말하는 그런 인물들의 삶. 어떤 상징적 형태도, 어떤 전형적 동작도 취하지 않는, 그런 점에서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인물들. 비인칭적 민중, 비인칭적 부처, 비인칭적 호랑이, 비인칭적 얼굴들, 이게 그가 빚어내고 발굴해내는 것이다. 말 그대로 ‘민중’을 떠올리게 하는 투박한 시골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다정하고 어여쁜 오누이, 심지어 세련된 도시의 여인까지도 그의 리얼리즘은 다 싸안는다.

 그래서 그의 리얼리즘은 추상적이고 심층적이다. 그것이 심층적인 것은 특정한 인물이나 행동이 아니라 비인칭적이기에 모든 이에 속하는 삶으로까지 밀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추상적인 것은 특정한 형태를 유난스레 돋아내기보다는 도드라진 모든 예각들을 평화로운 곡선으로 닦아내고 지워가며 추상하기 때문이다. 그 추상은 때론 간신히 눈과 코의 흔적만을 남기며 모든 것을 지우지만 그럼으로써 수많은 시간의 물결에 지워져 원만하고 부드러워진 돌멩이의 자연스러움이 살아난다. 자신을 스쳐간 모든 것을 긍정하는 삶의 원만함과 자연스러움, 그게 아마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의 이유일 것이다. 때로 그 자연스러움은 거의 모든 형태적 요소가 사라지며 알(卵)에 가까워진다. 아마도 들뢰즈라면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불렀을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는 어떤 ‘원형(archtype)'을 향해 회귀하는 게 아니라 ‘기관 없는 신체’를 향해, 결국 모든 신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런 추상을 위해 사람의 형상을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처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이영섭은 알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없이 내려앉는 삶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빚어지는 자연스럽고 따뜻한 감응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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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의 추상이 ‘기관 없는 신체’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든 모든 인물이나 동물들은 기이하게도 ‘한국적’이다. 정말 흔히 평하듯이 한국적 형상의 어떤 ‘원형’이 작품들마다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의 추상은 공통형식을 추출하는 추상이 아니라 모든 형식에서 이탈하는 추상이다. 그것은 어떤 형식도 지우며 가고, 어떤 원형도 지우며 간다. 그렇다면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한국적 형상의 감응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차라리 추상하며 나아가는 선들의 흐름에서 그 감응의 이유를 찾고 싶다. 그의 추상은 있는 것을 그저 지워버리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태를 따라가면서 그 형태를 지우는, 그리하여 원만하고 자연스러운 경로를 그리며 진행된다. 굴러다니는 자연석에 간단히 눈과 코를 그려 부처를 만들어낸 돌부처와 반대로, 그는 형태를 지우며 간신히 눈과 코만 남은 자연스런 돌로 만든다. 그 선은 자연스럽지만 어눌하고 수줍다. 확신이나 자랑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과시적인 선이 아니라 한발 물러서는 듯한 그 어눌하고 수줍은 선이 아마도 한국의 인물, 그것도 양반이나 ‘위인’이 아니라 비인칭적 민중의 감응을 만들어내는 것일 게다. 그의 모든 작품에 고유한 질감이 여기에 더해진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눈으로 만지게 한다고 해야 할 그 질감은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돌의 감응에 인접해있다. 이는 아마 모든 형상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서 한국적 감응을 야기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작품에서 형태적 요소들이 배열되고 자리 잡게 되는 방식이다. 그것들은 전체를 일단 하나로 보고 그것을 보기 좋게 분할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알 같은 것에다 무언가를 더하거나 붙이면서, 혹은 그것을 여기저기 가볍게 후벼 파내 만들어진다. 이는 아마도 그가 흙을 다루면서 작품을 시작했고, 돌조차 흙처럼 다룬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완성된 뒤에도, 더 이상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선 안될 어떤 꽉 짜여인 전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덧붙여도 될 듯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혹은 완성된 작품 옆에 다른 완성된 작품을 연이어 놓아두고 싶게 한다. 그 역시 나름의 완전성을 추구하겠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면 불완전해지는”(알베르티) 닫힌 완전성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하거나 이어놓고 싶게 하는 열린 완전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어떤 여유나 여백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여백이란 그저 비어있는 공백이 아닌 것이다.

이 여백의 미학은 비례 아닌 리듬을 ‘원리’로 삼는 듯하다. 비례란 전체를 분할하는 미적 형식이라면, 리듬이란 반복되는 추가를 통해 계속 더해질 수 있는 전체를 만드는 방법이다. 비례를 원리로 하여 만들어진 것과 달리 그의 작품에는 비례에서 이탈하는 큰 머리나 큰 팔이 달리기도 하고, 비슷하게 둥근 형태들이 다른 모습으로 연이어지기도 한다. 무언가를 덧붙여도 좋을 여백은 아마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리듬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기에 비례와 달리 새로운 것의 추가를 허용하며, 그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기에 다른 종류의 요소가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실패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공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드문 일이고 대부분 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의 성공에 안주할 때, 그는 거기에 머물고 정착하게 된다. 반면 성공을 내려놓고 떠나는 사람만이 다시 새로이 성공할 수 있다. 아무것도 미리 보장된 건 없다고 해도 말이다. 새로운 삶을 향해 “자, 다시 한번!” 하며 떠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노마디즘(유목주의)라고 한다면, 이 유목주의란 성공을 버리고 떠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고 해야 한다. 이영섭은 이 점에서 진정 유목주의자다. 테라코타의 성공을 버리고, 아무런 대책없이 고달사 뒷산에 올라가서 그는 발굴이라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이미 충분히 성공을 거둔 지금 그는 그것을 버리고 다시 또 떠나고 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은둔하던, 그 익숙한 대지를 버리고 도시로 옮겨왔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어디론가 갈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그가 또 한 번의 성공을 버릴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이 진 경(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서울산업대 교수)